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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근한 교실의 여름과 절정의 여름,

레몬향이 넘실거리는 첫사랑의 맛이 나

 

햇살을 받아 연한 갈색으로 빛나던 네 머리카락,

돌아갈 수는 없어도 펼치면 어제처럼 생생한,

낡은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단편 필름들

 

말미암아 절정의 청춘,

화성에서도 사랑해는 여전히 사랑해인지

 

밤이면 얇은 여름 이불을 뒤집어쓴 채 네 생각을 하다가도

열기에 부드러운 네가 녹아 흐를까 노심초사하며,

화성인들이 사랑을 묻거든 네 이름을 불러야지 마음을 먹었다가도

음절마저 황홀한 석 자를 앗아가면 어쩌지 고민하던

 

그러니 따끔한 첫사랑의 유사어는 샛노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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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 내어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 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 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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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오늘의 발견

빛나는 오늘의 나

 

하루는 내 동생과 한 이불 속에서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당시 그녀는 고3이었고 나는 스물일곱. 8살 터울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나이 차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학 성적이 좋아서 이과를 선택한 수현이는 고3이 되었지만 한 달인가 지나서 갑자기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 속을 엄청 썩이고 결국 사진기를 손에 쥔 지 4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중앙대에 가고 싶어, 언니. 근데 사진과는 서울캠퍼스가 아니고 지방에서 있어서 집에서 통학하기 쉽지 않을 텐데 어쩌지?' '그럼 나랑 둘이 따로 나와서 살자. 언니가 얼른 앨범 내고 돈 벌고 차 뽑아서 데려다줄게.' '내가 언니랑 따로 산다고 하면 엄마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걱정 마, 너 사진 공부 하는 것도 내가 우겨서 허락받은 건데…. 어디쯤에 집을 구하면 니가 학교 다니기에도 내가 홍대 가기에도 편할까?'

 

다음날 동생은 청량리역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난 만 원인가를 쥐어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청량리역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내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내가 계란 흰자를 좋아하고 그녀는 계란 노른자를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나는 닭가슴살을, 그녀는 닭다리를 좋아해서 치킨을 한 마리 시켜도 사이좋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엄마가 밥 먹으래'라는 한마디가 하루 중 우리의 유일한 대화일 때도 많았고 내 옷을 말없이 가져가는 것에 미칠 듯이 분노하며 엄마가 내 동생을 혼내는 날엔 나 역시 엄마 편을 주로 들곤 했지만 나에게는 역시 내 동생뿐이었다.

 

청량리역에서 사진을 찍던 동생은 이유 없이 포크레인에 깔려 즉사했다. 병원에는 경찰도 오고, 포크레인 회사 사람, 철도청 사람, 방송국, 신문 기자들이 왔다. 3일이면 충분한 장례식장에 11일을 머물렀다.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은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사진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 거야. 밤이 오면 옥상에 올라가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녀가 죽기 바로 전날, 새벽까지 우리가 그렸던 내일이 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대에 갈 수 없고, 사당 근처에서 같이 살 수도 없고 내가 돈을 벌고 차를 뽑아도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밥을 지어야 했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을 했다. 나는 바로 제주도에서 공연이 생겨 웃는 얼굴로 <바나나 파티>를 불러야 했다.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나는 계속 '내일'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내일은 뭐 해?' 하고 물어오면 '내일? 내가 어떻게 알아. 바로 죽어 버릴 수도 있는데.' 하고 이야기했다.

 

동생을 잃고 나서 얼마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관론자가 되었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쪼글쪼글 할매가 되어서야 맞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서 나를 언제나 마주하고 있었게 때문에, 별로 두렵지도 않았고, 늘 내일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은 그냥 다 써 버렸고, 살찔까 봐 조심스러워했던 식성도 과격해졌다. 술도 퍼마시고 담배도 피워댔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라는 것을. 동생뿐이었던 내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홀랑 데려가 버렸던 신의 의도를. 죽기 전에 우리가 보낸 새벽을. 그녀의 죽음을.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라는 엄마의 절규를. 그녀의 죽음을 통해 나는 무언가를 깨달아야 했고 그걸로 내 삶이 변화해야 했다. 깨닫지 않고서는 그녀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일 년 반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동생의 죽음의 교훈을 알아내었다. 그 교훈은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해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시시한 진실. 그것은 바로 '빛나는 오늘의 발견'이고 '빛나는 오늘의 나'였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내 동생을 잃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오늘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다. 나는 여러분이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고문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를 바라고, 너무 입고 싶어 눈에 밟히는 그 옷을 꼭 사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늘 보고 싶지만 일상에 쫓겨 '다음에 보지 뭐' 하고 넘기곤 하는 그 사람을 바로 오늘 꼭 만나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100만 원을 벌면 80만 원을 저금하지 않고 50만 원만 저금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고 싶은 옷을 참고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음으로 미루는 당신의 오늘에 다 써 버리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길 바라고, 당신이 무대 위에서 대사를 읊조리고 동선을 고민할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사진이 사람들의 호응을 살지, 이 그림이 얼마나 비싸게 팔릴지, 당신의 연기를 사람들이 좋게 봐 줄지를 고려하기보다 그저 당신이 원해 왔던 행위를 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행복을 더 우선했으면 한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의 오늘이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노래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오늘 수중에 돈이 없을 때면 맛있는 라면을 먹고 돈이 많을 때 내가 좋아하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먹는 게 행복하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하고 다음날 눈을 떠 조금 창피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2009년 5월 22일 뮤지션으로 살아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사진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 거야' 하고 이야기했던 엄마는 조금 틀린 것 같다. 수현이는 그날,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원했던 사진을 그날도 찍을 수 있어서, 찍고 싶었던 청량리역을 찍고 있어서, 내가 쥐어 준 만 원으로 맛있는 밥을 먹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얼마 전 차 안에서 그냥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듣고 나는 엉엉 울었다. 이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흘린 눈물이었다.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내일모레 공연을 위해 오늘 합주를 할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 나는 당신의 오늘이 행복하길 바란다. 당신의 내일 같은 건 관심도 없다.

 

 

 

2009년 5월 서울예대 학보에 실린 신수진(요조)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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